요한복음 교회공동체 영성

속죄 공동체인 대야교회- 요한복음 13장

ULI 2008. 8. 3. 14:41

(요한복음 13:4-8)

 

요즘 한국에서는 자기변화라는 단어가 압도한다고 한다. 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변화되면 산다는 것이다. 세계화 속에서 그 변화를 앞서가는 자는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삼성의 브랜드의 변화, 포항제철의 브랜드의 변화-포스코 등은 세계화에서의 대표적인 생존-서바이바벌 전략이었다.

한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아침형 인간’ 이란 책이 있다. 그 내용인즉 자기변화를 앞세웠다. 성공에 대단한 비결이 있는 게 아니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단순한 변화’만으로도 반쯤은 성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뻔히 알면서도 몸으로 실천하지 않고 게으름 피우던 것을 전문가가 조목조목 따지니 읽는 사람들 모두들 수긍하는 눈치다.

자기변화는 자기부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자기부정이라는 자기변화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제자의 태도이다.

 

미국의 석유황제로 대재벌이었던 록펠러가 어렸을 때였다.

한번은 착한 일을 했더니 사탕을 파는 아저씨가 “얘야, 여기서 사탕 한 움큼 집어가라.” 그랬다고 한다. 그러자 어린 록펠러는“아닙니다. 저는 됐습니다. 아저씨가 집어주세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이 아저씨가 감동을 해서 “너같이 욕심 없는 애가 다 있구나.” 하면서 사탕을 한 움큼 집어주었다.

옆에서 지켜 본 어머니가어떻게 그렇게 예의가 바르고 기특한 말을 하니?” 하며 칭찬하니까 록펠러가 말하기를 “내 손보다 아저씨 손이 더 크잖아요.” 이렇게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우리는 자기가 해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착각에 지배되어 살 때가 많다.

살아가면서 양보하는 것 같아 보이고, 희생하는 것 같아 보일 때가 오히려 더 큰 이익이 될 때가 많다. 지금 우리들이 당해 보이는 것 같아 보이고, 미련해 보이는 것 같은 때가 실은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 계시는 때이다. 소위 ‘자기희생, 자기부인’이라는 자기변화가 예수님이 보여 주신 제자도이다.

 

본문은 그것이 바로 일상생활에서 모두가 잘 쓰고 있는 그릇과 연관되어 있다.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대야에 물을 가득 채우고서는 네 발을 내밀라. 네 손을 내밀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고는 씻어주신 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대야 공동체 계시는 교회에 몸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를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교회 그리스도인들 세 그릇을 소유해교회가 부흥되고 개인이 축복을 받는다.

 

첫 번째는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는 돌 항아리 그릇이다.

항아리 안에서 된장 맛깔을 낸다.

항아리 안에서 맛을 내는 간장이 만들어진다.

항아리에 넣은 물이 정수가 되어 깨끗한 물이 된다.

항아리 안에서 독이 변한다.

땅에 묻어둔 항아리 안에 있는 김치가 땅 밑에서 겨울에 입맛을 돋워 준다.

항아리 안에서 동치미가 싱싱하고 새큼한 맛을 자아낸다.

우리 교회가 돌 항아리가 되어 그 그리스도의 특유의 맛을 내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다. 우리가 한 주간 사는 날 동안 그러한 변화를 체험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겠다.

 

두 번째는 생명을 공급하는 바구니 그릇이다.

우리 교회는 오병이어를 담은 광주리 그릇으로서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오병이어를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서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바구니는 구별하는 역할을 한다.

목적을 가지고 구별시켜 놓는다. 목적을 지닌 곡식으로 구별하게 된다.

또 바구니는 담아놓아 고르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일단 구별하여 담아 놓은 것은 업그레이드의 과정을 거치게 되고, 손이 더 가서 상품으로 소용되게 된다.

나아가 바구니는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 주인의 목적대로 꼭 필요한 물건 곧 곡식들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 바구니는 필히 음식물을 담게 되어 있다.

거기에 주님의 축복을 받은 기적의 오병이어를 담아 나누어 주게 되었다. 그러고도 열두 바구니나 남았음을 강조해 주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④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정말 정성어린 손길들이 숨어 있다.

이런 오병이어를 바구니에 담아 나눔이라는 역사가 일어났다.

누가복음 12:33-34 너희는 너희 소유를 팔아서,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는 스스로를 위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고, 하늘에다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도둑이나 좀의 피해가 없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랑을 담아 성결케 하여 하나 되게 하는 대야 그릇이다.

 

오늘 요한복음 13장에서 가슴 찡한 감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금은 기억 속에 사라져 가고 있는 대야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한다.

 

대야의 역할은 무엇인가?

대야는 먼지가 많은 더러운 곳에서 씻음, 하나 됨, 성결케 하여 치유가 이루어지는 역할 그릇이다.

 

?옷을 세탁할 때 사용하였다.

우선 세탁기가 없었던 그 옛날에는 옷을 빨 때에 빨래터에서 주로 쓰였다. 이때 모녀지간의 인간관계 증진이 이루어진다.

 

?또 손을 씻을 때에 매일 쓰였다.

주로 사내 아들을 씻어줄 때에 사용되어졌다. 여기서 모자지간의 정이 붙어 정담을 나누고 한다. 하루의 숨겨진 야사를 접수하며 정담을 나누었다.

“이리 내. 뭐했기에 이 손이 이렇게 더러워” 하며 혼내주었다.

“그 놈이 그랬어? 내가 혼내줄 것이다.”하면서 싸매주며 격려하여 모자지간이 돈독해졌다.

 

? 나아가 발을 씻고 몸을 씻을 때에 사용되었다.

이때의 대야의 역할은 가족 됨을 확인하는 아주 좋은 시간을 제공하였었다. 몸을 골고루 닦아주면서 “이건 네 아비와 똑같다.” “이건 어찌 내 것과 똑같네.” 하면서 가족 일체성을 일깨워지는 시간이 되었다.

더구나 아픈 몸뚱이가 보이면 위로하고 싸매어 주면서 “이제 씻었으니 곧 나을 거야.”하여서 위로의 시간이 되고, 치료의 시간이 되었다.

그러면서 인생의 미래까지 터치하면서 “너 지금 힘내야 돼. 그건 이렇게 해야 돼.”하면서 격려의 시간이 되고 인생살이 코치의 시간이 되기도 하였다.

더구나 함께 발을 담고 서로가 몸으로 교통이 되어 지게 되는 가족의식 그 따듯함을 교감하게 되었다.

 

? 김치를 얼버무릴 때 쓰인다.

그 안에서 따로따로가 하나 되는 것이다. 자기대로의 성격을 확 죽여서 섞이게 하여 하나 되게 한다. 그리하여 유일한 맛을 내게 된다. 이른 바 김치 맛이다. 소금이 들어가고 가진 돈을 들여 양념이 들어가고 하여서 얼버무려서 맛있는 김치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대야 물을 통하여 깨끗하게 하면 몸이 치유를 받는다. 이 성결은 곧 신유인 것을 알게 된다.

팔레스타인은 먼지가 많은 지역이다.

거기에다 신발은 마치 오늘날의 샌들과 같은 형태였으므로 발은 늘 흙먼지로 더럽혀져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환경 탓에 이스라엘에서는 손님이 방문하면 제일 먼저 물을 내어와 발을 씻기는 풍습이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처한 더러운 환경이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예수님께서는 그 더러운 발을 대야에 물을 담아 씻어주셨다.

이 때 발을 씻기는 것은 늘 종들의 몫이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다는 것은 주님이 종의 모습을 보이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섬김의 모습이다.

역사상 가장 놀라운 겸손을 담았던 그릇은 다름 아닌 다락방 구석에 있던 초라한 대야였다. 주님은 너희가 이와 같은 대야공동체를 이루라고 하였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다. 그런데 천한 인간들의 발을 씻는 종의 역할까지 자청하신 것이다. 이것은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겸손과 섬김의 절정이라 할 것이다.

더구나 이때는 예수께서 잡히시기 직전이었으므로 이날 보이신 예수님의 행동은 유언과 같은 각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내리 섬김을 강조하셨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13:14).

그것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한낱 어부요, 세리일 뿐이었던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신 사건이었다.

여기에 혁명이 일어났다. 인간의 삶의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 기적은 그 어떤 초자연적인 기적보다도 능력 있고 위대한 것이었다. 삶을 지배하는 기적이었다.

여기서 예수님은 '주'와 '선생'이 되어 발을 씻겼다고 했다.

주인이나 선생은 발 씻김을 받을망정 씻어주는 위치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발을 씻기신 후에 자신의 행동을 주인과 선생으로서의 행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세상에 남기어질 그리스도인들, 즉 교회의 직분자들을 향한 메시지이다.

믿는 사람들(교회)은 믿지 않는 사람들(세상)에게 영적인 선생과 같은 존재이다. 교회 주요 직분자들은 주어진 양들에게 영적인 선생과 같은 존재이다. 그들은 좋은 신앙의 사람들로 양육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이 지닌 기득권이나 명예를 벗어버리고, 그들의 발을 씻어 줄 만큼 섬기는 자리로 내려가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처럼 겸손한 사랑을 간직하고 산다면 주님의 권능은 우리의 교회 공동체 안에 충만할 것이다.

 

이렇게 대야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선한 세 가지 행동을 보아야 할 것이다.

 

첫째, 겉옷을 벗으셨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섬기기 위하여 제일 먼저 겉옷을 벗으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회계급을 말한다. 또한 기득권을 의미한다. 하늘 보좌도 버리신 그 분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신 그 분이 제자들 섬김 사역에서 확실하게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영적 선생님'이라는 것과 '삶의 주'라는 것을 벗어버리고 섬긴 것이다(13-15).

 

둘째,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었다.

허리는 중심을 상징하는 곳이다. 그곳에 예수님은 수건을 두르셨다. 제자들을 섬기고 씻기기 위해서였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자기 사람들을 충심으로 섬겼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가장 중심적인 과제로 취급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일에 전념하셨다.

예수님은 허리 중심에서 흐르는 그 피로 우리 죄까지 씻어주셨다.

 

셋째,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었다.

여기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 주었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더러운 것을 씻어주었다는 상징성이 있다.

⒜이 세상의 고달픈 인생길을 간자들의 발을 어루만지었다. 사랑의 보듬음이었다.

⒝또 죄로 얼룩진 그들의 인생길을 씻어주는 영혼의 보살핌이었다. 인간의 흔적 그 족적들은 아름다운 것 같으나 얼마나 이기적인가?

⒞나아가 예수님의 발 씻김은 제자들의 인생에 새 힘을 주시고 새 자리로의 전이를 이루어주는 발 씻음이었다.

“너 이제 새롭게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새로운 일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남의 허물을 씻어주는 역할을 하면서 관계 증진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서로 씻어주어야 한다.”

⒟나아가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천국에 분깃이 없다.” 는 계시적인 사건이었다. 곧 그리스도에게 씻음 받지 못하면 천국 가족의 축복이 주어질 수 없다는 대속론을 보여 주시기도 한 것이었다.

고로 우리 인생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죄 씻음을 받아야 할 존재이다.

우리가 사랑의 대야인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선적으로 그리스도로부터 죄 씻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의 피로 씻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증진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인간관계의 증진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