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이 이래서 비껴갔었다. 김회창 목사
웬 요셉이 비껴갔다는 말인가 라는 말을 당장에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 성결교회나 교인들이 요셉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요셉 신드롬에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꼼작없이 당하고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어머니 영성으로 요셉을 물리친 그 형 유다 족장에 대한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요셉이 밀린 이유를 적어보면서 함께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첫째로. 요셉은 80년 이상을 총리라는 권력에 취하여 살다가 영성적인 것을 고갈시켰다.
요셉을 좋아한 사람들에겐 이게 웬 글이냐 라고 할 것이다.
그러니 그가 유다 형에게 밀린 것이 사실 아닌가?
그는 창세기에서 형 유다에게 완패한 게 사실이다. 그는 창세기 50장에서 하나님께서 일찍 그를 거주어 들이신다. 그러나 그 한 장 전에서 그 형 유다에게 족장 아버지 야곱은 최고의 축복을 하였었다. 그러더니 그를 조기에 데려가신 것이었다. 깨끗하게 완패한 것이 사실이다. 그 형 유다의 역전승의 모습이 너무나도 완벽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 창세기인 것을 우리는 너무 왜면 하였었던 것이다.
창세기는 세속적으로 변하여가는 요셉에 집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성적인 것에 그 핵심이 있음을 다시 보아야 성경이 보이고 구속론이 보이는 것이다. 요셉은 총리 80년 넘도록 한 것이 이렇게 보여 진다. 그것이 이것이다.
그는 의롭게 청소년 청년시절을 보내면서 아버지 야곱과 하나님의 점수를 딴 인물이다. 성경은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였음을 힘주어 강조한 부분을 창세기 39장에서 세번 강조하여 주고 있다.
그는 50세가 넘어가면서 영성적인 고백이 45장 과 끝에서 두 번 나온 것이 전부이다. 형제들을 만날 때에 그러하였고 죽을 때에 그러하였다. 그 기간이 60년 가까운 기간이었다.
그러면 그가 그 60년 기간 동안에 어떻게 살아갔을까?
그 아버지 야곱에게서 그 답을 찾아보면 그 아들 요셉이 도저히 낙점을 받 수 없는 영성적인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형 유다를 보고, 그 주위에 그 동생 그것도 애굽의 실세 총리 앞에서도 유다에게 최고의 축복을 하였어도 그 누구하나 안돼요 라고 한 자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전에 "아버지 이 아들에게 그 축복을 주셔야 됩니다. 이 아들이 큰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사랑해주시던 장손입니다." 라고 하였던 실세 총리 요셉인데도 막상 자신을 축복하는 시간에는 형 유다에게 한 축복에 아무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형 유다에겐 뭔가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음에 생각하고자 한다.
둘째로, 요셉이 족장영성을 지켜가지 못하였음을 창세기는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 우리는 속고 있었다는 것이다.
창세기의 저자의 요셉에게 누가 되지 않은 표현력에 우리가 속은채 그렇게 해석하여 요셉 우상화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성공의식이 제일인지라 목회에서도 그렇게 인용하기에 급급한 채 구속론이 없는 성공적인 창세기 설교 패턴에 급급했음을 인정해아 할 것이다.
요셉에게는 증조할아버지가 세운 족장영성의 핵이 없었다. 그 예배드림-제사영성이 보이질 않았다. 그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영성이 보이질 않았다. 가나안 언약영성이 보이질 않았다.
단지 그는 의롭게 살았다는 것으로 표현했을 뿐인데 우리 교역자들이나 모두가 거기에 심취하여 버려서 거기에 스며든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율법적인 차원인 것이다. 의롭게 살아 성공하였고 강조하는 것은 마치 우리가 죄인인데 죄인이 아닌 양 말하는 것은 율법적인 차원의 해석이 아니겠는가?
요셉은 족장들이 가지었던 그 영성을 실천하지 않다가 오랜 만에 이민 온 아버지 야곱에게 "그것이 아니다"라고 17년 이민생활을 가름하면서 유언을 듣게 되었던 것이었다.
선조 아브라함의 신앙은 부활영성이며 그것은 제사, 기도, 가나안 언약 영성으로 이어가는 족장영성인 것을 그 아버지 야곱은 죽으면서 축복기도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요셉이 이렇게 그 뒷심이 약했던 것은 그 어머니의 영성이 세속적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아버지의 그 사랑 전달 얼마나 컸었는가? 그가 유언 시에는 요셉을 제치고 유다 아들에게로 집중하였다.
그 요셉의 어머니 라헬의 사랑 얼마나 그득하였던가?
그런 어머니의 세속적 영성 이식은 그 아들을 신앙의 아들로 키우지 못하였고 세속 주도권 정권을 잡는 권력욕에 사로잡히게 하는 방향으로 가게 하였었던 것인데 우리는 그 요셉의 장기집권을 미화시켜 울거 먹었던 것이 사실이 아니가?
창조주 하나님은 그 형 유다에게, 그 부활의 인생에게 그 원대한 구속의 역사를 맡겨 놓았다는 것을 되세기는 묵상이 있었으면 좋겠다.
셋째로, 요셉은 그 야곱 공동체를 가나안 언약에 컴백시키지 않은 우를 범하여 그 기간이 수치 기간으로 변하였던 것이다.
요셉은 50세 정도가 되었을 때 아버지 야곱이 남긴 "내 해골만이라도 가나안에..."라는 말을 계시적으로 들었어야 했는데 그만 지나쳐 버리고 살다가 죽을 대에야 내가 잘못살았다 내 해골만이라도 가나안에 묻어달라고 총리의 엄한 권한으로 명하고 죽게되었다. 자신이 산 것은 하나님의 은혜뿐이었다고 고백하게 되었다.
그는 후회스러운 인생말년을 보내었다는 것이었다. 창세기 46장 말미에 나온대로 황제의 눈치를 실컨 보다가 그 하나님의 영성을 상실한 채 살다가 그런 유언의 주인공이 되었을 뿐이다. 그는 아내의 영성적인 도움을 입지 못하였었다. 더구나 그 어머니의 영성적인 도움을 보지 못한 채 살다가 가장 중요한 구속론의 중심에서 빗겨나갔다.
그가 가나안 언약을 간과해 버리는 것은 타락의 길인 것이고 수치의 길인 것이다. 그가 거해야 할 곳은 가나안 땅이었을 뿐이었다. 그는 그 형제단을 조속히 컴백시켜야 할 권력자이었다. 본인도 가야 했었고....
결국 그 후손들이 '길갈'에 이르러서야 그 애굽의 수치가 굴러가버렸다고 선포되어질 때에야 그 후손들은 알아차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 요셉의 자녀들에게 심겨진 영성도 여호수아에게 대들고 선조들이 해 논, 일구어 논 정복 업적을 울거먹고 나중엔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초가 되는 등 그 결과가 나타났다.
우리의 목회 선조들이 은퇴할 때에, 나아가 세상을 떠날 때에야 "내 사역이 너무 세속적이었어, 돈으로 명예 해결하려고만 했어, 돈 목회를 했어." 라고 후회하는 자들이 많음을 상기하게 된다.
지금 하나님의 핵심 목적에서 벗어난 사역을 수정해야 할 때이다
우리 교단 모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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