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목회수상

자기진단-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는 제자들은 아닌가?

ULI 2010. 8. 2. 15:35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는 제자들은 아닌가?

 

마가복음 14:27, 50에 보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는 제자들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주고 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도망하는

그 모습이 어떤지 아세요?

당시

본인은 그거 생각도 못했을 거예요.

나중에 알지.

아주 중요한 것을 버리고 수치를 드러내며 도망한다(52).

벗은 몸으로 도망한다.

베 홑이불을 버렸으니.

이는 벗은 몸으로 도망한다는 말이지요.

 

‘베 홑이불’은 무엇인가?

 

이것이라도 들러 입고 있으면

수치가 가려지는데 말이다.

1)신앙인이라는 신분을 버린다.

2)신앙의 직분을 업신여기고 사라진다.

3)예수님을 믿는다는 그 하찮게 여기던 것이라도 버리면 그 인간에게는 수치만 남는다.

그 인생 다 된다.

왜냐 하면, 본문의 제자가 자기가 걸친 베 홑이불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데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홑이불마저 버리면 뻔하기 때문이다.

곧 수치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버린 인생은 곧 수치스러운 운명을 지닌다는 계시이다.

우리가 지내기 힘든 시절을 보내면서

너무 힘들다고 다 내팽개치면 안 된다.

그게 끝이다.

그래도

걸치는 것이 있어야 탈이 안 난다.

그 걸치는 것을 확실하게 걸쳐야 한다.

 

세계 역사에서 한 예를 들어보겠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종교는 아편이라고 하면서 그 잘난 신앙마저 버리게 하였다.

신앙이 좀 느슨하였다면 중앙으로 진입하려고 해야 답이 나오는데 말이다.

그들 속에 있었던 성직자들마저 그 이념에 편승하여 교회로부터 이탈하였었다.

그들마저 신앙이 아닌 제도가 구원한다고 하였다.

그 이념이 백성을 구원한다고.

거기에 속한

성직자인지 세속인인지

구별이 안 되게 살면서도

하나님이 살아있니 아니니 하였다는 것이다.

그 잘난 신앙마저 버리니

예배자의 모습마저 버리더니

국제적인 거지가 될 정도가 되어 결국은 손을 들어버렸다.

그런 70년 정도가 지나

그곳에 다시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면서 먹을 것이 생기게 되었다.

 

자기 자신의 안일만을 생각하다가 인생 망치는 것이 된다.

우리가 유혹될 때에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막 8:33).

이렇게 하다가 영적탈선이 생긴다.

사단이 역사하는 50% 제자의 모습이다.

사단의 유혹을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영적인 탈선은 언제 생기는가?

사탄이

사람을 유혹할 때 즐겨 사용하는 네 마디 말에 있다.

 

첫 번째는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말이다. 작은 실수 하나가 사람을 함정에 몰아넣는다. 큰 물고기도 작은 미끼에 걸려든다.

 

두 번째는 “딱 한번인데 뭘”이라는 말이다. 사탄은 항상 ‘딱 한번’이라는 말을 유혹의 무기로 사용한다.

 

세 번째는 “너는 아직 젊어”라는 말이다 사탄은 교회 출석을 결심한 사람의 귀에 이렇게 속삭인다. “네가 교회에 출석하기는 너무 젊어. 조금만 더 기다리라구.”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 젊은 시절을 허송하고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네 번째는 “누구나 이렇게 사는데 뭘”이라는 말이다.

자기 합리화하면서 죄악의 나락에 빠져든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을 강조한다.

1)좁은 문은 군중에 휩쓸리지 않는 삶을 뜻한다.

2)내가 결단을 하고 좀 겸손하게 살아가는 길을 말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붙드는 한 순간에 성공적인 인생의 길에 접어든다.

왜냐 하면,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파워가 있는 주님이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인생은 한 순간의 결단에 의해 성패가 갈리기 때문이다.

오늘 붙드세요.

결단은 성공의 절반이다.

그러므로 어려운 시절에는 예수님을 버리는 자가 아니라

붙드는 자가 지혜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