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그리스도인

둘.육신적인 그리스도인-도덕적인 신자 단계

ULI 2009. 11. 9. 01:09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골의 분류에 의하면

사람들은 3가지 단계 방법으로 자기 실존을 찾는다고 합니다.

1)“바닥 단계에서는 육신의 감각을 자극하는 쾌락이 통로입니다.

2)다음 단계로는

도덕적인 단계로 무엇인가 자신이 정해 놓은 선행을 행해 봄으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으려 합니다.

3)자기 한계에 부딪친 인간이

마지막으로 종교에 귀의해 신을 찾음으로 자기 실존의 길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여기서 두 번째 도덕적인 단계

즉 율법적 신앙의 단계에서는

1)여러 모양으로 자신의 존귀함을 행함으로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2)주위에서 인정받는 시선을 위해 생명까지도 바칠 만큼 열성이 대단합니다.

3)자신의 선행이 높이 쌓여질수록 정의감이 높아집니다.

4)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빙자한 판단의 눈높이 또한 높아집니다.

5)모든 행동, 말하는 태도에 거룩의 옷을 입습니다.

6)자신이 설정한 규율이 절대가 되어 온 세상이 따라 주어야 합니다.

7)심지어 하나님도 동의하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스스로를 높고 귀하게 여기는 만큼, 어느 누구도 따라주지 않는데서 큰 벽에 부딪치게 됩니다.

1)뜻대로 되지 않는 모든 환경에 화가 치밉니다.

2)아니 자신의 고귀한 뜻을 인정해 주지 않는 듯한 모든 사람들에게 화가 미칩니다.

3)심지어 하나님에게까지 화가 치밉니다.

 

이 시기의 특징은

1)감정의 기복이 심합니다.

2)매사에 비판적입니다.

3)불평, 불만으로 건드리면 터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4)분노에 찬, 벌집 쑤셔놓은 땅벌같이, 한마디로 가까이 가기조차 사납습니다.

5)늘 누가 옳고 그른가로 시시비비를 가려 다른 이를 몰아세워야 직성이 풀립니다.

6)다른 이들이 얼마나 자기 때문에 상처를 깊이 받는지 전혀 시야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7)오직 자기주장 관철에만 목숨을 겁니다.

자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타인을 판단하는 색 안경을 통해 봅니다.

 

목회자인 경우엔

소위 치는 설교가 대부분이며 제사장적 권위, 권리 주장에 집착합니다.

일반 직분자의 경우에

도덕적인 단계 곧 율법적인 단계에 머무르면

1)기도의 내용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이들에 대한 정죄, 고자질로 저주에 가까운 분으로 가득합니다.

2)공중 대표기도시

그러한 마음의 상태이기에 하나님보다는 듣는 사람을 의식합니다.

기회는 이때라 싶어 횡설수설 때리는 설교식 기도를 장황하게 늘어놓곤 합니다.

3)지나친 율법주의의 독선으로 인해 잠시 왕따 당합니다.

4)반격으로 당을 지어

꼴 보기 싫은 이를 사명을 띠고 고립시킵니다.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합니다.

감언이설, 물질, 친절 공세로 자기 당을 만듭니다.

5)기득권 주장하여

자기의의 깃발을 들고 교회의 분란을 일으키는 무리의 대장이 됩니다.

6)점점 세상적 지혜에 눈이 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는 말씀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적용합니다.

일단 자신은 순결한 자로 여겨 놓고

“뱀같이 지혜로우라.”는 말씀만 부분을 강조하여 적용합니다.

7)정면에서는 유한척 최선의 친절을 베풀며

뒤로 돌아가서는 자신의 친절 공세에 넘어간 어리석은 자들을 부축혀 뒤에서 조정, 눈에 가시인 사람을 기필코 매장해 버리고 맙니다.

8)전형적인 교회의 보이지 않는 병폐,

정치 노름의 적나라한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의 중직에 있을 때,

교회는 찬바람 돕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은혜가 가로막히고 가고 싶지 않은 냉랭한 곳 됩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린 소금의 모양만이 남은 빈껍데기 썰렁한 곳이 됩니다.

9)물론 저들도 자기 성찰, 자기반성도 심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부족한 죄인으로 서기보다는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는 의도가 더 많습니다. 때문에 자신을 살리려는 율법이 오히려 자신도, 남도 죽이게 됩니다.

 

가인을 자세히 관찰해 보고 묵상해 보면

가인의 모습에서 율법적인 사람의 비극적 삶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이 드린 제사는

자기 밭의 소산으로 드렸습니다.

자기 눈에 보기에 자신의 솜씨가 대견스러워

자랑하고파 제일 잘된 것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아깝지만 미안하지 않을 만큼 겨우 안면 치레하는 것으로 때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벨은

오직 제사 받으실 이인 하나님 중심으로

자신을 겸비하고,

정성을 다하여

속죄 원리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자신의 가장 귀한 더 나은 것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바라보는 진실함, 이것을 기뻐하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육식을 좋아하셔서,

혹은 아벨을 편애하셔서

어느 누구의 것은 받으시고,

어느 누구의 것은 기분대로 물리치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