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교회공동체 영성

광주리 바구니 공동체 교회

ULI 2008. 12. 14. 05:24

생명을 공급하는 광주리

광주리공동체-교회관 (요 6:1-13)

 

우리가 다니는 몸담은 교회 공동체는 어떤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 어떤 그릇인가?

(생명의 그릇: 돌 항아리-요 2:1-11, 바구니-6:5-15, 대야-13:3-17)

 

광주리 바구니는 둥글고 속이 깊고 작게 만든 그릇으로, 짚이나 싸리나무나 대나무로 엮어 만들어 작은 일상용품을 보관했던 용기를 통틀어 이른다.

㉮ 버들바구니가 있다.

가장 오래된 짚으로 만든 바구니는 평양 근교 채협총에서 발굴된 것으로 2천 년 전 우리 생활에서 쓰던 바구니의 모양을 보여 준다.

㉯ ‘싸리바구니‘가 있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방형연당지(方形蓮塘址)에서는 백제시대 싸릿가지로 엮은 바구니가 출토되었는데, 이 바구니는 그 기형과 기법이 전수되어 지금도 많이 제작되고 있다.

㉰ 둥구미가 있다.

바구니는 주로 짚으로 제작되었으나 이 바구니처럼 특히 볏짚 이외의 짚으로 엮은 둥그런 그릇은 바구니라 하지 않고 따로 ‘둥구미‘라 했다. 둥구미는 대체로 볏짚만으로 엮었지만, 때로는 다른 재료를 섞어 엮기도 하였는데, 이 유물은 날줄은 볏짚으로, 씨줄은 왕골속을 써서 만들었다.

이러한 바구니의 쓰임새는 매우 다양해서 ⓐ부엌에서 사용했던 조리 용구에서부터 ⓑ바느질 도구를 담아놓는 반짇고리, ⓒ농산물을 말리고 담아 두는 그릇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이용되었다.

특히 둥구미는 전국적으로 가장 많이 쓰인 바구니였다. 이 둥구미는 농사를 지을 때 자주 이용하였는데, 가을이면 갈무리한 여러 가지 잡곡류들, 특히 콩, 팥, 녹두, 깨 따위를 담아두기에 편리해서 추수가 끝난 후, 곡식을 담아 보관하였다.

㉱ 대나무 바구니가 있다.

주로 시골에서는 나물을 삶아서 보관하였다. 고구마를 삶아서 보관하였다. 밤을 삶아서 보관하였다. 맛있는 떡을 보관하였다. 구멍이 듬성듬성 뚫려있어서 그늘에 보관하면 음식이 쉬지 않아서 제격이었다. 빵을 찔 때에도 사용하였다. 그러면 맛이 더 우러난다.

우리나라의 그릇 가운데 ‘화수분’이라는 말이 있다.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는 말인데 무엇을 넣어 두든지 그 안에서 계속 새끼를 쳐서 아무리 꺼내도 줄어들지 않는 신기한 그릇이라고 한다. 물론 배고프던 시절, 부족함 없이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망을 투사시켜 지어낸 말이다. 하지만 만일 그러한 그릇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기적을 부르는 그릇으로 각광받을 것이다.

요한복음서에는 이러한 그릇들이 있다. 오늘 오병이어를 담아서 나눠준 그릇이 바로 그러한 그릇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을 공급하는 그릇-바구니'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한다.

6: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예수님의 축복을 담은 기적을 일으키는 그릇으로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담았던 열두 바구니이다.

오늘날 이 세대에서 하나님의 표적이 많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것을 간직하고 담는 일들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생명의 능력을 담아 자신에게 진정한 유익이 되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이적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들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다. 그저 배부르면 그만이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통하여 나눠주시게 하시고 그 한 바구니씩 그 기적의 오병이어들을 가득 차게 담아주시었다. 이것은 교회를 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의 이적을 베푸시고 이 유월절 사건을 기록하여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기억하게 하셨다. 이것이 성경을 기록케 하고, 보존하신 하나님의 의도이다.

성경의 유월절 사건을 해마다 기억하라는 것은 인간의 생명의 주권자는 하나님의 것임을 계시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는 기억(memorize)이요 하나는 계시(revelation)인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의 생일을 매해마다 눈곱아 기다린다. 그리고 축하해 준다. 이것은 단순한 축하가 아니라, 태어남의 강조이다.

‘너는 태어난 존재이다. 너는 피조물이다.’ ‘너를 출산한 자가 있다. 너를 기른 자가 있다. 오늘 네 생명이 있기까지 너를 후원한 자가 있다. 너를 담은 생명의 그릇인 어머니가 있다.’

이 사실을 계속 강조하는 행위가 생일축하 행사이다.

오늘 우리는 생명을 공급하는 바구니 공동체를 생각하면서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소원하는 바이다. 여기 열두 바구니는 생각하게 하는 그릇인 것이다.

광주리 바구니와 같은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첫째로, 구별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 바구니의 구별하는 역할은 드림을 위해서이다. 쓰이기 위해서이다. 바구니에 담는 물건은 어떤 목적을 위하여 구별시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도 바구니 공동체와 같은 역할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구별시키는 일인 것이다. 이렇게 구별시킬 때에 구별시키지 않은 것보다 훨씬 더 크게 쓰임 받게 됨을 보게 된다. 이것을 하기 위하여 교회 바구니는 모아놓는 역할을 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우리를 불러 모으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너는 나를 따르라.”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전도하여 주님께로 구별시키는 역할을 교회 바구니는 해야 한다.

그것 가운데 하나가 학습과 세례교육을 시킨다. 소위 기초 교리를 가르치고 주 예수님을 영접한 소양교육을 하게 된다. 여기서 “그렇습니다.” 라고 해야 학습을 주고 세례를 주어서 구별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하는 제자학교가 다 이런 종류의 교육인 것이다.

둘째로, 담아놓아 고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바구니는 보관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종자의 보관 내지는 쓰임의 목적에 따라 담아놓는 것이다.

콩은 콩대로 보관해야 한다.

고구마는 고구마대로 보관해 놓는다.

사과와 바나나는 구별하여 따로 보관한다. 같이 두면 상하기도해서 보관하는 바구니도 다르다.

잘 담아두는 원리가 창고의 원리인 것이다. 창고보다 더 효과적이고 얼마 있지 않아 써지게 하는 보관이 바구니 보관이다. 그러하도록 담아놓는다. 쓰여 지도록 하는 것이다. 일단 담겨진 곡식들은 손보아서 더 고르게 되는 것이다. 업그레이드하는 작업의 일종인 것이다.

바구니에 담아지면

썩는 확률이 적어진다. 주인의 각별한 보살핌이 있기 때문이고 바구니가 산소를 잘 보급해 주기 때문이다.

담아 있어야 오염이 덜 된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좋은 사립학교 보딩 스쿨에 보내고 좋은 크리스천 사립학교를 찾아가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 생활이 그렇다.

주님께 쓰임 받도록 구별하여 담아놓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구별된 자가 담아 놓여 있는 곳이 교회 공동체인 것이다. 곧 써지는 역사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 모여서 천국대학 교육을 받으니 얼마나 업그레이드되겠는가? 여기서 최상품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우리 인생들이 생명을 공급하는 바구니에 담겨지니 곧, 생명의 그릇에 담겨지니 얼마나 좋아지겠는가?

셋째로, 분배하여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바구니 역할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실제로 쓰일 만큼을 전달하는데 제격이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여러 크기의 모양으로 제작되어진다.

제가 어렸을 때에 시중들은 심부름이 있었다.

“야, 그 콩을 저 바구니에 담아 가져 오거라. 저 쌀을 그 바구니에 담아 가져와.”

그러면 잘 담아서 전달해 드렸다.

오늘 우리들은 여러 종류의 크기의 교회에 몸 담고 있다. 복음의 전달자로서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의 비밀을 맡았다고 바울은 그렇게 표현한 바 있다. 우리에게 담겨진 복음의 비밀을 전달할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그것을 잘 전달할 때에는 놀라운 변화된 역사가 나타난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교회들이 바로 이런 역할을 감당할 때에 장정만 5,000명이라도 남녀노소합치면 2만 명도 넘는 사람들을 먹이고도 남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남을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는 본문에 나온 이 열두 개의 바구니를 생명을 공급하는 생명의 바구니라고 부르려고 한다. 여기 생명의 바구니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변화시킨다.

그날 예수께 나아왔던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께 무언가를 얻으려 나왔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질병을 치료 받기 위해서 나왔을 것이다.

㉯혹은 놀랍도록 권세 있는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 나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뜻하지 않게 훌륭한 만찬을 대접받게 되었다. 그들은 가져가도 줄어들지 않는 신기한 기적의 떡과 물고기를 보았다. 아마도 그들 중의 대부분은 이 일을 통하여 예수님을 신비한 기적을 일으키는 권능자 정도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 표적을 통하여 예수께서 주시고자 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것, 그것은 곧 생명을 뜻한다.

우리는 같은 요한복음에서 이와 유사한 구절을 떠올릴 수 있다.

4:13-1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마셔도 마셔도 계속 솟아나는 샘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그것은 생명의 물이다. 예수께서는 수가성 야곱의 우물에서 멈추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물을 가르치셨.

㉲이제 디베랴 바다 건너편의 그 산에서는 영원히 끊이지 않는 생명의 떡을 직접 보여 주신 것이다.

모세 시대의 40년 광야 생활에서 내려진 만나는 하루만 지나면 먹지 못하였다. 그나마도 가나안에 들어가면서 끊어졌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떡은 영원히 끊이지 않아서 그것을 취하여 먹는 자마다 결코 주리지 아니하리라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6: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우리 교회는 이러한 곳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 공급되는 곳으로서의 모습을 지녀야 한다.

세상 속에서 시달리고 지쳐서 영원한 것에 굶주린 사람들이 생명의 떡을 공급받을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누구나 손을 내밀기만 하면, 끊어지지 않는 생명의 말씀힘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럴 때 교회는 생명력 있는 곳이 되는 것이다.

㉴그 기적의 내용물들이 상품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잘나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의 모양이 번지르르 해서 이루어지는 일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기적을 일으킨 음식이 기름진 고기에 각종 진귀한 과일들이 즐비한 진수성찬이었는가?

㉠그것들은 단지 초라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을 뿐이었다.

㉡기적을 담았던 그 바구니도 화려하게 치장된 것이 아닌 그저 그런 시골 바구니들이었음을 역시 기억해야 한다.

이 말은 교회 안에서 생명력이 넘치는 것은 바구니 안의 음식물로 비유할 수 있는 교인들의 학력수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도 아니라는 것이다.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어서도 아닌 것이다. 더구나 바구니인 교회가 대형화되고 화려하고 멋지게 건축되어 있어서도 아님을 깨닫게 해준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이(only Jesus)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어떤 역사인가?

물고기와 떡이 믿음 안에서 예수님에게 바쳐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린아이처럼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리려는 헌신의 결단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작은 헌신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있다. 교회 안에서나 사회에서나 작은 것이 가장 큰 것이 됨을 기억해야 한다.

여덟 번째로 작은 막내 다윗이 왕이 되게 하셨다.

교회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교회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안드레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는 아이가 갖고 있는 것을 주님께 소개하는 것까지는 잘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이 주님의 손 안에서 위대한 역사가 일어날 것은 미처 보지 못하고 지절거려댔었다.

6:8-9-"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오늘날도 대부분 교회들은 큰 공헌을 하는 교인들을 선호하면서 내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적은 것으로 애쓰는 손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안드레가 어린아이의 그 적은 양식을 무시하였듯이 말이다. 그것이 표출된 것이 대형교회 선호사상이다. 작은 교회들을 무시한다. 작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보잘 것 없는 어린아이의 떡과 물고기 일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많은 양식으로 변화되어 불어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사실은 누구의 바구니냐에 따라 그 질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세상의 것은 누구의 것이냐에 따라 그 내용물이 다르다. 그러나 그 결국은 그 훌륭하다고 한 것들이 다 썩기 일쑤다.

생명력이 고갈되어지기 때문이다.

생명력은 오직 주님의 고유 권한의 것이다. 영원한 생명력은 바로 주님의 능력인 것이다. 주님의 것은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의 떡이요, 생명수 강물이기에 다르다.

☜주님께서 이것을 오늘 축사하신 그것을 담게 하심으로 기적이 계속되게 하신 것이었다.

그 오병이어라는 조그마한 도시락에 손을 얹으사 감사기도를 드리시고 나누어주라고 하실 때에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바구니에 그 오병이어를 잘라 담는 순간마다 생명의 변화의 역사는 나타났던 것이다.

이 바구니는 바로 주님의 기도하신 것을 담을 때마다 더욱 빛났다. 주님의 브레싱(blessing)에 위대한 역사는 나타나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 손을 얹으신 것이 그렇게 변하였던 것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담아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 수만의 사람들을 다 먹이고도 열두 제자들은 자기 바구니에 충만하게 채워지는 기적을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우리 신자공동체인 교회도 그런 바구니 교회가 되는 축복이 오늘 주어지길 소원한다. 주님의 그 손이 와 닿는 기도받은 그 지체에 놀라운 생명의 기운은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이다. 주님의 축복을 입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대에 주님의 축복을 보여주는 축복의 그릇 그 바구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적용부분이다)

분명 5병2어를 드린 손길은 여러 손길을 동원한 축복의 손길이 되었다.

1. 어린이의 드리는 손이다(9,11).-"자기 부인", "전적 헌신"이었다.

2. 안드레의 알리는 손이다(8-9).-조그마한 것이라도 주님께 알려야 한다.

3. 어머니의 숨은 손이다(9).-역사는 숨은 손길에서부터이다-출애굽은 모세 부모의 손길, 산파들이 숨은 손길에서부터였다. 레아의 지칠줄 모르는 섬김의 손길에 하나님은 그 후손에 축복을 내리셨다.

4. 예수님의 복되게 하는 손이다(11).-모든 것,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주의 손으로 축복을 받을 때 변화되어 진다.

5. 제자들의 나눔의 손이다(11).-주님의 축복은 나눌 때 기쁨이 넘치고 역사는 일어난다. 주님은 지속적인 제자들의 나눔 속에 열 두 바구니 안의 축복을 보여 주셨다.

☜생명적인 축복기도를 담은 그 그릇은 아무래도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 기도하는 어머니를 둔 자녀는 결코 망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