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통 중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나?
마 8:23-27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추구하여 이곳 미국에 온 청교도들은 신대륙에 도착하며 다 되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도착 이후 생존이라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도착자 거의 절반이 죽어지고 황량한 현실 앞에서
그들은 이렇게 기도도 했을 것이다.
“주여 우리의 기도 결과가 이것입니까?
이렇게 되도록
하나님은 뭐하고 계시었습니까?
우리들이 소위 청교도들인데 말입니다.“
또 그 이후 정착 되는가 했더니
노예제도가 문제 되었고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
이 때에 그들은
“주여, 이제 남과 북이 싸우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보면서 언제까지 우리를 이렇게 내버려 두실 것입니까?
주여,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들은 소위 청교도들의 후예들입니다.”
라고 하였을 것이다.
우리 인간의 삶의 환경은 고통이 수반된다.
낸시 스타우트(Nancy T. Stout)는
“Where is God in my suffering?-나의 고통 중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나?”
라는 소책자를 출판하였다.
그 내용 중에
그녀는 남편이 새로운 직장이 되어서
19년 동안 오하이오에서 산 이후 최근에 델라웨어로 옮기게 되었다.
그녀는 친구, 동료, 사랑하는 집, 교구, 메디칼 돌봄, 의미 있는 일을 남겨두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옮겼다.
그러한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나는 그 손실과 변화를 지나는 것이 매우 고통이었다.
나는 외롭고 고립되었다.
그리고 우울한 추억만큼이나 더 크게 악화되는 새로운 문제를 경험했다.”
고 하였다.
이와 같은 고통은 이기어 내기가 어렵다.
그녀는
왜,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났는지 궁금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가 고통 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지?’
그 질문은
상처와 비난을 받을 때 의문이 되는 것들이다.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1)우리는 나의 깊은 내면을 볼 수 있다.
2)나의 마음 안에 믿음을 찾는다.
3)나에게 주신 약속을 재시험한다.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삼위 하나님의 각별하신 언급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하나님 아버지는
인간에게 결코 고통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날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이시라고 하였다.
2)성자 예수님은
‘나를 믿기만 하면 환난 끝’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할 것이다’고 하시었다.
3)성령님께서도
선교하는 바울에게
‘네가 예루살렘에 가면
환난과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강하게 권고하시기도 하였으나 바울은 생명을 내놓겠다고 다짐하고 가서 선교간증 보고를 하게 되었다.
우리의 삶은 즐거움도 있지만 걱정도 있다.
그렇지만 주님은 우리의 고통 중에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들이 어둠 속에 있을 때,
또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는 것 같이 보일 때
그 시간 동안 하나님께로 어떻게 다시 연결할 수 있을까?
오늘 본문에 보면,
여기 고통의 과정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을 배우는 것이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과 더불어 배를 타고 건너편 마을로 선교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바다에 큰 광풍이 일어나 놀이 생기어 큰 물결이 배를 치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 몸을 배에 두고 잠시 잠들게 되었다.
그런데 제자들은 난리 법석이었다.
뱃멀미 정도가 아니었다.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주여 구원해 주세요.”
이에 일어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도 책망하시었다. “뭐 그리 방정 떠는가!”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시니 아주 조용하여졌다.
그들이 인간이기에 그러하였을 것이다.
뱃멀미는 진해 앞바다 해군을 순시하였던 고 박정희 대통령도 인정하였다고 한다.
생존의 불안이 생기었다.
죽을 것 같았다.
평안이 사라지고,
토할 것 같았고, 개중에는 토해내었다.
그것도
어부들이 그랬었다.
얼마나 광풍이 거세었으면 그리하였겠는가?
제 자신의 경험과 연결하여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배를 타야 했었다.
섬에서 인천에 가려면 필수적으로 타야했었다.
도시에 가보려고 방학을 기다렸었다.
여름에는 그래도 괜찮은데 겨울에는 아주 심하였다.
특히 겨울에는 늘 상 바다 바람이 강하였기에 배를 탄 지 30분만 지나면 여기저기서 구토해내는 소리가 들렸었다.
저는 뱃멀미는 그래도 참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유전인자가 그래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바람이 심하고 파도가 큰 날에는 머리가 띵해진다.
배에서 내린지 여러 시간이 지나서도 그렇다.
한 번은 서울에 길갈교회에서
개척하여 목회를 할 때에
교회 장로가 백령도 여단장이 있어서
서울북지방회 목사님들 내외분 80여명을 모시고
수련회차 위문차 방문하게 되었다.
그날은 일반 여객선은 가지 못하는 파도 3미터의 높이었다.
조그마한 함정을 타고 가서 구축함에 갈아타고 가는데 갈만하다고 다 인정하였다.
그런데
백령도 근처에 다 가서
구축함이 부둣가에 정박할 수 없어서
조그만 함정으로 갈아탔는데 갈아타는 데서부터 어려웠었다.
구축함은 젊잖게 있는데
조그만 함정은 2미터 이상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이었다.
옮겨 타는 것이 모험이었다.
놀이시설인 청룡열차에 탄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함정 안으로 들어가 한 20분 남짓 가는데 그 잠간 사이에 얼굴들이 하얗게 질린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눈빛들이 달라졌다.
여기저기서 싸움이 일어났다.
뭔 싸움이었겠는가?
목사님 부부들이…..
바로 쓰레기통 차지하는 싸움이었다.
멀미가 일어나 구토하게 되니 체면불구였었다.
지금도 생생하다.
1993년도 생각난다.
“아휴 죽겠다.”
그러고 갔으니
그곳에 근무하는 해군들이, 해병장병들이 얼마나 위대하게 또한 고통스럽게 보였겠는가?
지금도 만나면 그런다.
“특별난 추억이야.
일생 한번 하기 힘든 추억이야.
민간인 신분으로 어떻게 구축함과 함정을 타…. 해군 장병들 참으로 고생이 많아....
작은 배를 타고 근무하는데 그 좁은 공간에서 고생은 무슨 고생 놀이이지! 라는 생각을 송두리째 뽑는 사건이야.”
이렇게 군인들의 고생을 이해하는 계기들이 되었다.
나의 고통 중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첫째로, 하나님은 나의 고통 속에 함께 우신다.
우리들은 수련회 중에 하나님께서 개인들을 치료하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수련회동안 ‘상상기도’를 하기도 한다.
그 장면으로 들어가는 상상하는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 직접적으로 하나님에게 가는 기도이다.
하루는
“Where is God in my suffering?-나의 고통 중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나?”를 쓴
낸시 스타우트(Nancy T. Stout)가 기도를 하였다.
개인적인 사건에서 두 장면이 떠오르게 되었다.
하나는 고통스런 경험이다.
첫째는 갑자기 죽은 친구가 떠올랐다.
그 친구는 아침 조깅하고 돌아오는 중에 심장의 고통을 느껴 그의 집 마당에서 죽었다.
그의 지난 순간에 그와 함께 아무도 없었던 사실을 고민하였다.
그런데 그녀의 상상기도에 예수님이 나타났다. 주님은 그의 팔로 들어 올리고 그를 옮겼다.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강한 상황이었다.
둘째는 그녀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녀가 수련회 기도 경험할 때까지 항상 폭행당한 시간이 완전히 짐이었던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치유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런데 ‘상상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작은 소녀인 자신이 폭행 당할 때에 그 방에서 홀로 있지 않았다.
방 한 구석에 예수님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눈물이 주님의 얼굴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때 거기에 계셨다.
하나님은 어떻게 해를 당했는지, 수치 당했는지 아신다. 이렇게 사랑하는 것을 깨닫고서 이 기억을 충분하게 치유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가는 길이 험할 때
나와 함께 머무른다는 것을 가르쳤다.
아직도 우리들이 어둡고 힘이 들 때에
의심이 계속 갈 수 있다.
그것은 정말 유혹 시험의 형태다.
그 의심은 하나님 안에 우리의 믿음으로부터
항상 어두운 쪽으로 시도하는 유혹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무겁게 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고통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가면 하나님의 동정어린 만남을 경험할 수 있다.
둘째로,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통하여 만진다.
이런 면에서 신앙의 친구가 있다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이다.
또 신앙의 멘토가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이렇게 내 자신을 돌보는 것은 옳은 것을 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무엇이 필요한지 사랑의 만짐으로 치료가 된다.
신앙의 사람들을 지니고 있으면 유익하다.
언제 그런 만짐이 필요한지 용기 있게 노트하라.
어떻게 해야 할지.
언제 병에 걸렸는지.
당신이 전화했을 때 밤에 병원으로 오는 사역자가 있다면 고통을 알려라.
사랑하는 자의 장례 때는 친구에게 전화하라.
이것은 고통의 표현이다.
우리들의 고통이 육체적이든지, 감정적이든지, 영적인 것이든지 표현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은 서로 다르게 치료를 주신다.
의사들은 더 경험할 것이다.
“내가 그 처방은 안했는데도 그가 낳았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현재 육체적으로 온다.
종종 짧은 몇 마디 친절한 말들로 온다.
따뜻한 포옹으로도 온다.
어깨를 감싸 안는 팔로도 온다.
인간의 만짐의 힘으로 치료가 임한다.
신앙의 사람들을 통하여 영혼의 상처 받은 곳이 만져지고 그 아픔을 치유 받는다.
돌보는 동료를 가진 것은
무엇이 고통인지를 강하게 돕는다.
도움을 위해 물어볼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
친구, 영적 상담자를 지니게 되면
그들로부터 충분한 용기를 가지게 된다.
계속-설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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