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강연
제목: 6 25환난의 한미동맹과 위기적 한반도의 미래 대비
강사: 김회창박사
(그레이트 한반도 통일 리더십 연구소(CIU부설) 대표,
트리니티대학교 총장,
AKTV Founding Chairman,
KVMCF SC 상임고문,
한미동맹강화 특위 미주총괄위원장-윤 캠프,
트럼프필승한인팀 TVKT 총회장)
제1장. 들어가는 말
본 논제를 정하면서 다음의 다섯 가지 질의를 할수 있다.
첫째. 반만년 한반도 역사에 한국군 40만명이상, 한국민 100만명 이상 사망과 피해를 본적이 있는가?
둘째.반만년 역사성을 가진 한국을 대한민국되게 한 적이 있었는가?
셋째.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주변의 거대국들의 견제를 벗어날 수 있었는가?
넷째. 한반도에 전쟁 지상 최대의 목표를 가진 북한 정권이 과연 평화를 추구한 국정운영이 있었는가?
다섯째. 한반도의 1948년 남북 분단 이후 70여 년 역사를 남북으로 나누어 분석하면 한국의 세계적 비약에는 어떤 요인이 있었는가?
대한민국은 1948년 건국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남침을 당하여서 다 망가지게 되었고, 정신적 육체적 상흔에 쌓여 있었는데, 2022년이라는 세계 속의 한국이 되게 되었다.
여기의 다섯 가지 질의에 대한 답을 역사적 상황 속에서 융합해내고자 한다.
제2장 한반도에 6 25동란으로 탄생한 한미동맹
한반도를 자유 민주주의와 독재 공산주의와의 대비적인 결과들을 이면적 역사에서 하나님이 드러낸 역사로 볼 수 있다.
한반도는 강대국들의 센터에 있게 되어 전쟁이 수 없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북한의 김일성의 구 소련의 사주를 받은 1950년 6월 25일의 기습 남침 전쟁이 가장 잔인한 전쟁이었다. 필자는 그것을 다음의 김민남의 언급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UN의 결의로 이 전쟁에 참여한 국가가 16개국이다. 북쪽에는 70만 '중공군'이 참전했다. 인명피해는 제2차 세계대전을 능가한다. 사상자(死傷者)만 200여만 명에 이르고, 산업시설과 철도 및 도로 등 기간 사회간접자본은 거의 완전 파괴되었다. 전쟁의 잔인성과 이념의 참혹성이 보여준 20세기 후반의 사실상 국제전이다. 이 폐허에서 10여 년만에 다시 일어섰으니 우리는 정말 대단한 국민이고 세계 유례없는 복구재건(復舊再建)의 역사를 기록한 국가다." (김민남의 생각이 멈추는 곳, civicnews.com, 2019.7.7)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참상은 사진으로 보면 더 잔혹스럽다. 참전한 미군도 공식적으로 33,686명이 전사하였고, 알 수 없게 된 그 장병과 상이군인이 10만이 넘었다. 한국동란에서 공산주의는 '어찌 인간이 이렇게 잔인하게 싸울수 있을까? 뇌는 있는 것일까?'의 질문을 하게 하였다.
북한의 김일성의 의도적 통일 착각이 빚어낸 파괴력은 전제 공산주의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드러낸 결과로 입증되게 되었다.
사진 참고:
이렇게 한국전쟁이 치뤄지면서 16개국 참전 유엔군을 주도한 미국은 한국인들을 지울 수 없는 나라로 뇌리에 각인되어지게 되었다.
여기에 미국에서 유학하며 미국의 삶을 경험한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애국의 영감적 결단이 하나님의 생각을 한미관계로 엮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6. 25 전쟁으로 엮여진 바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상호방위조약(大韓民國-美合衆國間-相互防衛條約, Mutual Defense Treaty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약칭: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10월 1일 체결되고 1954년 11월 18일 조약 제34호로 발효된 대한민국과 미국간의 상호방위조약이다."(한미상호방위조약, 1953, ko.m.wikipedia.org, 2022, 6.4.).
세계 최강국인 미국이 세계적인 극빈국에다가 전쟁으로 처참한 나라가 된 대한민국을 형제 국가로 여기게 되어 법적인 카운터파트로 대하여 서명을 하였다. 이로부터 한국은 미국의 혈맹국으로 자리잡았다.
제3장 위기적 한반도의 미래 대비
한국은 당시 공산국가 원천들이 담합적 그룹으로 번성해가던 시대의 지역적인 접근지에 있었고, 더구나 공산 종주국 러시아와 교류가 쉽게 열려 있어서 일제로부터 공격을 받은 러시아나 중국이 일본이 대륙진출의 그 발판으로 삼은 것처럼 한국을 미국과 일본의 완충지로서의 전략적 한반도로 침을 삼키던 시대에 공산당에 가입한 수하 김일성을 앞장 세워 한반도를 전쟁판으로 충동하여 6 25 남침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그 후 최악의 전쟁으로 삶의 터전이 다 망가져버렸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 후 1953년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이 한국인의 미래가 열리게 된 한미동맹 강화와 국가의 비약적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한미동맹이 한국에 가져다 준 보장성은 다음과 같이 수 없이 많았다.
첫째, 군사적 안정이다.
한미동맹은 북괴의 침략을 저지하는 안전판이 되었다. 휴전국가 상태에서 지금까지 70여년간 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 그로 인하여 군대생활을 하는 장병들의 생명을 안전케 하였다.
또한 오늘날의 세계적인 전쟁국가인 북한의 침략을 막게 하고, 경제적인 것이 보이면 침탈하려는 중국의 야욕이 꿈틀거리는게, 미군으로 인하여, 그에대한 세계 최강의 미군의 첨병의 군사력 유지가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시키고 있다.
둘째, 국민의 삶의 돌봄이다.
동족상잔의 비극 하에서 처참해진 한국인들에게 미군이 보급해주거나 던져주는 초콜렛은 한국의 어린이들의 삶과 가난한 인생들을 지탱해가는 희망사건이었다.
"give me chocolate?"
필자는 서울에서 개척한 길갈교회에서의 나사로예배 곧 홈리스 사역을 겸한 자로서 누구로부터 희망의 음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근거가 되었음을 목격했었다.
미국은 한국에 공적인 국가적 지원 외에도 동맹국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교회들과 OMS선교회와 선명회(후에 World Vision) 등의 기관들을 통하여 강냉이 밀가루 음식, 옷종류, 교육시설, 병원시설, 복지시설, 종교시설 건축지원 등으로 한국인의 삶을 희망적으로 재건해 주었다.
셋째, 경제적 원조이다.
미국은 동맹국 한국의 경제발전 개발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그것이 한국의 재건과 근대화 산업화의 근간이 되었다. 그것은 1948년 이래 미국의 원조는 미국에서 대통령에게 부여한 법적인 보장을 아래와 같이 받고 있었다.
"제1조
미합중국 정부는 1948년 6월 28일에 통과된 법률(제80의회, 법률 793호) 및 해당 법률의 개정 또는 보충에 따라서 미합중국 대통령이 허용할 범위 내의 원조를 대한민국 정부에 제공하기로 한다." (한미원조협정 1948,10, contents.history.go.kr, 2022, 4.4.)
이러한 기반 하에서 6. 25 동란의 참화는 미국인의 마음을 움직여 한국 재건 프로젝트에 국가적 교회적 지원이 물밀듯이 있었다.
이러한 조치를 앞장서서 취한 자는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이었고 그의 혜안이 참화 속의 한국을 재건하는 열린문이 되었다. 권오중은 "1945년 해방이후 1960년 4 19까지 미국의 대한(對韓) 원조 총 금액은 약 28억 달러였다. 미국이 제공했던 막대한 금액의 원조는 대한민국의 안보를 유지하는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했다. (권오중, 대한민국의 건국이후 미국 주도의 경제원조 (1948~1960년), cfe.org, 2022.6.4).
이러한 기본적 지원외에도 한미군사보호조약으로 인하여 1953년 11월부터 1954년 6월까지 미군대한원조(AKAK) 건설사업 진행으로 $6,762,471을 학교재건 130곳, 고아원 57곳, 교량 51곳, 공중위생시설 58곳, 관공서 60곳, 교회 22곳, 도로...등을 재건하여 주었다.(서일수, 6.25전쟁 복구사업과 미군 대한 원조(AFAK) 프로그램).
이와같은 경제적 지원은 한국의 재건과 발전 정책인 경제개발계획에 많은 참고가 되었다.
넷째, 인간 희망주기이다.
전쟁의 참화로 고아로 불구자로 기아로 허덕인 절망상태의 한국인들에게 한미 군사 상호 보호조약은 한미동맹 강화의 근간이 되었고, 그 실제적인 인간의 생애에서 극한 상황에 처한 약자들에게 미국은 한국인의 희망이었다
또한 미국인들은 고아들을 양자로 받아들였고, 학비 장학금 지원은 한국교육사업에 지속되었고, 이승만대통령의 추진으로 미국 장학금 유학길이 더 열리었다. 그리고 한국의 신학교에 장학선교금은 차고 넘쳤었고 필자도 미국 신자들의 OMS 장학선교헌금으로 학비를 받았었다.
더우기 미국의 군사적 지원으로 육사 11기부터는 미국의 군사교육프로그램의 지원을 받게 되었고, 한미동맹의 강화는 초중고 미션스쿨의 지원과 한국에 교육적 지원과 대학교들과 경제 기술연구와 현대 문화시설의 정상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동기부여 되었다. 더구나 미국에 한국인 이민을 받아 주어서 250만의 미국교포를 이루었고, 오늘날의 세계적인 자태를 가지게 되어 세계적인 학문, 기술, 문화, 그리고 신학적 토대를 마련하여, 오늘의 한국인에게 북한을 감당하는 흡수적 통일에로의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은 6. 25 참화 후에 소련과 중공을 우방으로 맺은 북한과는 상대가 되지않을 정도로 수십배로 세계의 잘 사는 나라로 되었다. 북한의 경제적 국제적 최악의 상태는 기아상태로 입증되고 있다. 이에 반하여 한국이 선진대국으로 우뚝서고 있음에는 한미동맹 강화가 베이스되어 훈련된 군인출신들의 산업전사화되어서 환난 속에 축복되었음을 상기한다.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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