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문화권에 인천상륙작전 수행한 맥아더 장군 소통 지도력"
9.10.2022. KVMCF SC강연
강사: 김회창 박사
(교차문화 의사소통 리더십 전략 전공 선교학 박사.
그레이트 한반도 통일리더십 연구소장 (CIU 부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기념사업회 미주대표.
한미동맹강화 특위 미주총괄위원장 (윤 캠프).
트럼프필승한인팀TVKT 총회장.
남가주 한국예비역기독군인회 직전회장 및 지도목사.
트리니티대학교 총장)
인간의 문화소통은 메라비언보고서에 의하면, 93%가 비언어적(무의식적, 잠재의식 반영, 그 문화적 해석)으로 전달된다. 세분하면 목소리로 38%, 얼굴표정으로 55% 전달된다.
여기서 비언어적 의사소통은 언어적 메시지를 보완, 다른 메시지와 대조될 수 있고, 언어적 메시지를 반복할 수 있고, 의사소통을 규제한다. 이처럼 대화의 흐름을 통제하는 주요수단이라고 칼리 도드가 역동적 커뮤니케이션(p.222)에서 언급했다.
인천상륙작전하면 누구나 먼저 맥아더(Douglas Mac Arther, 1880. 1. 26-1964. 4. 5) 원수를 한국을 지키어낸 인물로 떠올린다. 그의 전투 작전을 문화 소통적으로 살피면서 "타문화권에 인천상륙작전 수행한 맥아더 장군 소통 지도력"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로, 성장 문화 배경
맥아더 원수의 성장 문화는 개인적(individualistic)이고, 저맥락(low context)로서 전혀 눈치 못채는 문화코드로 이해 된다. 이런 문화는 직접적(direct)인 해결을 시도하는 서양생활 문화권으로 성장했다.
또한 체면이 덜 중요한 문화(less important)이었다.
그는 유럽계의 스콧틀랜드계 미국 군인 가문 출신으로 군사 집단 문화권인 장군의 아들이었고,
미국 아칸소주 리틀록 출생(1880. 1. 26-1964. 4. 5)이었다.
그는 스콧틀랜드계 미국인 뉴욕커로 성장한 장군이다.
그에게는 웨스턴 스타일이 몸에 배어 있었고
거기에 군사문화의 센터인 미국 육사 웨스트포인트를 다님으로 애국적 미국인 문화적 군사 문화로 전향될 수 있었다.
둘째로, 가정적 문화
맥아더의 아버지가 미 육군 중장이었고, 형이 2명(아서 맥아더 3세, 맬컴 맥아더 2세)이 있었다.
아버지 장군은 베터랑스이었는데 스페인 전쟁과 필리핀 전쟁 참전 지휘관이었고 예편후 법률공부 후 재입대하였고, 규칙을 강조하는 지휘관으로 기독교 신앙심이 깊었다.
그의 어머니(메리 P. H. 맥아더)는 전쟁에 참전한 남편하고는 멀리하게 되었던 때에 아들 맥아더가 있는 육사 웨스트 포인트 근처에서 뒷바라지를 해준 교육과 섬김으로 아들을 돌보아 준 신앙적인 어머니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신앙의 기본인 원칙을 지키었으나 이혼 후 재혼하는 쓰린 삶도 있었고 어려움중에 있는 아들에게 주는 명기도문이 남겨져 있다.
그는 성경적 정신이 기본으로 되어 있었고 세상의 악은 척결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나라 구현하는 가정적 문화가 헌신할 수 있게 하였다.
셋째로, 인천상륙작전 가능케 한 정의실현 전쟁 참전 군사 문화
우선 맥아더는 군사학교 문화로 정의실현 가치관을 몸에 담았다.
미 육사 웨스트 포인트를 수석으로 공부하였고, 미 육군참모대학, 육군지휘참모대학교를 나온 정통 군 장교이었다.
그는 가정적인 군사적 신앙문화를 이식받은데다가 웨스트포인트 재학시에 학교폭력을 경험할 때에 양심대로 가해자를 고발한 정의감도 있었다.
이런 그가 이중적이거나 가식적이거나 한 것에는 저항하였고, 정직한 교육문화권을 지니게 되었고, 그래서 동료들에게는 때로 적이 있었다. 또한 맥아더는 "마음을 터 놓은 소수의 친구"를 귀중하게 생각하였다.(위키백과). 이것은 그의 지휘 통솔 지침의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나아가 그는 참전경험과 육사교장으로 정통적 군인문화 추구자이었다.
그는 1차 세계대전에 미 육군 42사단 참모장하다가 준장 진급하고, 임시 사단장도 최연소로 시무하였다.
또한 그는 맥시코 혁명전쟁, 1차,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4회의 베터랑스로서 최상급의 전쟁문화를 경험한 자이었다.
그는 최연소 소장으로 진급하였고, 미육사 웨스트포인트 교장을 하였다.
그는 필리핀에서 명예 육군대장이 되었고, 1937년 필리핀 육군에서 원수가 되었으나 미육군에서는 1941년 대장으로 복귀하였고, 1944년에 미 육군 원수로 진급되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나라를 구별하는 정의실현의 도구가 될 수 있었다.
그에게는 잘못된 것에 대한 심판이 당연시 되었고, 그것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했던 일본에 원자탄 투하하는데 반대하지 않고 그 장소만 조정하여 정신적 유산의 도시 오사카를 피하고, 1945년 8월6일에 히로시마와 8월 9일에 나가사키에 투하하는데 함께 하기도 하여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게 하였다. 그 당시에 세상의 신으로 교만 떨던 일본 천황을 모욕주는 심판으로 항복문서 조인식에서 보요주었다.
맥아더 장군은 제 1, 2차, 그리고 한국전쟁 이라는 크고 긴 전쟁에 참전하면서 전쟁터의 국가에 어떤 영향성을 주려고 하였다.
그는 일본 집정 직무사령관 권한대행 서리 1년(1945. 8.15-1946. 8.18) 동안에 일본 천황문화를 개화하려고 하였다.
그는 "천황은 인간이다"라는 발언을 이끌어냈고, 같은 피조물임을 인지시키었었다. 그 구체적인 역사적 사진을 남기었다. 그것은바로 183cm의 맥아더와 165cm의 쇼와 천황이 함께 사진을 찍었고, 더구나 천황은 차렷자세였고 맥아더는 "짝다리 짚고 두손은 바지 주머니에 넣어" 인간은 신이 아니고 신 행세를 한 천황을 일본인 앞에 드러낸 것이었다.
이 이후 일본 내에 천황의 권위가 실추되었고, 오히려 천황보다 더 높은 새로운 신이 등장하였는데 당시 팬 레터가 44만건이 넘는 바로 "맥아더 원수신"으로 턴업되기도 하였었다.
여기서 맥아더 장군은 일본을 바꾸기 위하여 "탈군국주의화 4대 정책"을 시도하였다.
1.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을 묵인하였다.
2.교과서 내 천황 신격화 금지 조치하였다.
3.군 지원한 재벌해체하였다.
4.전쟁 책임자 공작자 2만명을 공직에서 추방하였다.
여기서 보듯이 맥아더는 인간의 평등화 민주주의화를 시도하였으나, 일본 군정이 종식된 후에는 다시 번복되는 일들이 나타났다.
한반도에서의 김일성 삼부자 신격화 문화를 해체하야 할 샘플을 볼 수 있다.
이같이 맥아더 장군은 사탄에 붙잡힌 나라를 빼앗아오는 행동에서의 하나님 나라 문화 코드가 인천상륙작전 참전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넷째로, 타문화권에 인천상륙작전 수행 가능케 한 맥아더 장군 소통 지도력
그의 타문화권에 전략적 소통이해와 분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의 경우, 맥아더는 스페인과 필리핀사령부의 지휘관에 이어 군에 복귀하였고, 마지막으로 태평양사령부를 일본에서 지휘하면서 예하에 한국에는 미 제28군단에 존 리드 하지 중장을 대리인으로 미 군정청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우선 맥아더 장군은 한국의 국제적 지도자인 이승만 박사와 좋은 연대를 하였다.
이승만 박사가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에 초가을에 이승만 대통령을 일본에 초청하여 그 권위를 일본 천황에게 인지시키었고, 한국방위 지원도 받았고, 귀국시에는 자신의 전용기 바탄호를 내어주기도 하였다.
1950년 1월 21일에 다시 그를 초청하여 한미관계에 대한 확인으로 격려는 일본 앞에 해주었으나 무기지원은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이 사건이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한국전쟁 중에 한미군사협정이 절실하게 필요함을 절감케 한 것이 되었다.
나아가 한국전쟁시 인천상륙작전에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전략적으로 소통하며 작전하였다.
제1단계 월미도 점령, 제2단계 한미인천반도 공격으로 워싱턴정가의 반대에도 이승만 대통령의 전화 요청을 1950년 6월 26일 밤10시 30분경에 받고 트루먼 대통령이 결심해 결국 명령하달함으로 맥아더 장군은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 수원으로 갔고 그 30일 워커중장의 24사단을 한국으로 가게 하였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을 한미합동으로 하였고, 미 육군7사단, 미해병1사단, 국군해병1연대 국군 17연대 해군이 참전하게 하였다.
여기서 그는 함정 206척과 7만여 장병을 지휘통솔하여 한국측에서는 해군 손원일 제독과 함께 영종도 인근에서 상륙전을 실시하여 5000분의 1의 확율을 성공시키었다.
그의 성공 지침에는 "군대에 민주주의는 없다"고 유엔군총사령관 취임에서 밝혔었다.
또한 지휘관은 옳곧고 실속있어야 함을 주지하였다.
꽉차지 않은 지휘관은 외면하였다. 한국의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을 허세 높고 실속 없음을 간파하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언하여 정일권 장군이 육군참모총장으로 교체되기도 했다.
더나아가 그는 한국전쟁을 조속히 종결하기를 바랐고 전략적 접근으로 5대 전략이 있었다.
1.압록강 피안의 적 보급기지 폭격,
2.중공 경제 봉쇄 실시
3.미 해군으로 중국 본토의 연안 봉쇄,
4.공군이 중공 본토 공격,
5.타이완에 있는 국부군에 가해진 제한을 없애야 한다.
이러한 전략적 사고를 유지하며 전쟁을 감당하였다.
인천상륙작전에 함께 한 현지 상황에 밝은 해군 창설자인 손원일 제독은 6 25 전쟁을 참전하면서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장군, 공군참모총장 김정열 장군과 의형제로 지낼 정도로 전우애가 있었다. 그는 미군과의 깊은 연대 강화로 미국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특히 그가 지휘한 해군에는 일본의 해군에서 한국출신을 수용할 영역이 별로 없어서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없었다. 해병대에는 1, 2, 3대 사령관이 만주군 출신자들이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에 해군과 해병대도 꼭 참전시켜야한다고 주장하여 참전케 되었다.(위키백과).
그러므로 맥아더 원수와 함께 상륙작전한 손원일 제독은 정의실현 전쟁 문화 코드, 기독교적 가정의 선악관 코드, 나라에 대한 애국관 문화코드가 서로 소통되어 인천상륙작전을 필사적으로 성공케 하는 요인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맥아더 원수는 전략적 군지도자이며 나아가 사회운동가요 세계적인 정치가로 평가되는 지도자이다.
그가 미육사 웨스트포인트에서 은퇴하면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명연설을 하였다. 그는 웨스트포인트의 야구선수출신이었는데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기 위하여 순간적 작전의 진수를 전쟁터들마다 보여주었다.
그렇게 많은 세계적 전쟁에 참전한 맥아더에게도 틈새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중공군이 참전한다는 백선엽 장군의 보고 은폐와 한국전쟁이 곧 끝난다고 속단하여 미군의 보급품을 하와이로 돌려보내게 함으로 전쟁이 길어지자 그 책임을 지게 되었다는 기록은 믿어지기 어려운 사실들로서 군사문화에서는 정보문화가 분명해야 작전이 성공할 수 있음을 맥아더 원수 사령관이 후배들에게 지금도 말해주고 있다.
모세의 열두 정탐군을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땅 정복을 위하여 파송하고 보고 받아 대책을 세우고 정복전쟁해 나간 것은 승리의 정복작전 문화로 전설적이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하나님의 정의의 나라를 추구하는 기독교 가정문화적 배경, 서양문화적 직설적 경험, 집단을 움직이는 군사교육과 전쟁문화적 배경, 애국자 가문의 문화적 배경, 반공산주의적 사고철학으로 연합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다.
맥아더 원수는 연합작전에 대성공을 하여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낼수 있었고, 이승만 대통령으로 하여금 한미동맹을 이끌어내는데 합리적인 협력을 하였다. 그는 세계역사에서 스탈린의 지원을 받는 공산당 김일성의 남침으로 파산이 되어가는 아시아에 소중한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지켜냄으로 전쟁에서 전략적 문화 소통의 역사적인 결과를 유산으로 남겨놓은 창의적인 지휘관이었다.
Unification Leadership Institute for Great Korean Peninsu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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