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개척

열정적인 교회(개척) 사역이 죄가 되는 경우

ULI 2009. 11. 17. 08:53

 

열정적인 교회사역이 오히려 죄가 되는 경우

 

이 땅에는 아주 열정적인 사역자들과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주위의 교회 안에도 큰 능력의 사역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예수님 중심으로 이룬 사도영성을 벗어나 세속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것은 많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 성공과 실패를 단정합니다. 이것에 대하여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그날에 크게 역사했다고 자부하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르노라.”고 선포하실 대상자가 있음을 말씀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도영성을 강조한 배경으로 곧 열정적인 교회사역이 오히려 죄가 되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를 다음 여섯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현재 목회하던 교회에서 가까운 이웃 큰 교회로 목회 사역지를 성공적으로 옮기는 경우 그것은 재고해야할 행위입니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의 목회자가 요셉이 지녔던 세속적인 부분에 매료되어 권좌에 이르듯이 활개 치며 사역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물량적이고 세속적인 출세지향주의에 젖어서 박정희식의 중흥주의를 우상화하여 세속적인 성취감으로 행세하곤 합니다. 마치 집권하면 다 된 양 판을 잡듯 합니다. 개중에는 교세의 수적 증가를 자기성취감으로 자기출세식으로 해석한 나머지 사회에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할 선교적인 사명을 잊은 채 이웃교회 신자쟁탈전을 벌입니다. 그리하여 교인의 수평이동을 부추기어 인근의 개척교회나 적은 교회 사역자들을 스트레스 받게 합니다. 그들중에는 교회의 온갖 추태를 세상에 떠벌리기도합니다. 소위 나의 교회가 성장하였으니 내가 법이요 해댑니다. 이런 것은 세속사회에서도 지탄받는 것이며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있는 경우일 것입니다. 지금은 사도들의 정도를 걸은 그 영성목회가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둘째. 몇 년간 애써서 교회 건축 혹은 건물을 구입해 놓고 빚 남기고 옮기는 경우 그것은 재고해야할 경우입니다.

대개 평신도들은 세속적인 잣대로 건축하거나 건물을 구입하면 성공했다고 판단하고 그런 목회자를 담임목사로 청빙하곤 합니다. 더구나 그 헌신의 공로를 인정받아 평생 그 교회에서 목회하기로 하고서 옮기는 경우는 몇 몇을 제외하고는 삯군이요 출세욕에 잡혀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비성서적인 목회자의 길을 걷는 경우일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자기가 져야할 십자가를 엉뚱한 목회자나 평신도에 떠넘기는 경우에 해당됩니다. 큰 교회들은 그런 것을 판단하고 그런 자들에 대하여 심사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그 교인들은 목사님을 바라보고 교회 건축운동에 함께 하였고 거룩한 예식을 지켜보았는데 소 잃고 우리간에 허탈하게 남아있는 경우일 것입니다. 적어도 목회자는 빚을 거의 갚을 때까지 신자들과 멍에를 함께 하여야 할 것입니다. 소위 함께 결의된 소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 위임된 거룩한 것을 세속적으로 취급하는 경우에 해당 될 것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들은 사도들이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한 영혼을 귀중하게 여긴 그 소명영성의 길을 가야할 것입니다.

셋째. 교회 부목사로 전임사역을 하다가 인근에 개척을 하는 경우 그것은 재고해야할 행위입니다.

이런 경우에 같은 교회에서 수년간 정이든 신자들은 많이 갈등하게 됩니다. 돕자니 담임목사에게 배반하는 것 같고 돕지 않자니 개척자를 외면하는 것 같아 죄스럽고 이런 경우는 신자들을 참으로 곤란하게 하는 경우입니다.

이민 교회들이 여기에 피멍이 들고 지역선교에 오히려 역기능적인 선교환경을 만들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근에 개척하는 목회자들은 참목자가 아니고 비성경적인 밥벌이식임을 인식하여야 할 것입니다. 큰 교회를 찾는 부목사들 가운데 혹 그런 낌새는 없는지요? “밑져야 본전이지 뭐…….” 이런 식의 생각을 한다면 문제일 것입니다. 다 타락한 목자의 양심일 뿐입니다. 더구나 그것을 부추기는 양은 이리요 염소일 뿐입니다. 이런 세태속에 남이 뿌린 텃밭에는 삼갔던 사도들이 추구한 정통 목회영성은 절실하게 요구되어지는 것입니다.

넷째. 더 나뿐 것은 큰 교회 담임하다가 교회 당회 안의 갈등으로 그만두고 공회의에서 결의 없이 인근에 개척하는 경우 그것은 재고해야할 행위입니다.

이런 경우에 신자들은 어떡하란 말입니까? 그 목사 편에 서야 합니까? 또 다른 세력 혹 장로 편에 서야 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제 삼자인 안수집사 편에 서야 합니까? 참으로 말세입니다. 교회의 타락이 심각합니다. 이런 더러운 이력서들을 자랑스럽게 개척했다고 말하여대니 세상이 교회를 우습게 생각하고 세상 라디오 칼럼에 호남파와 이북파 영남파가 기존 세력과 신진 세력이 교회 내에서 싸운다고 그러대는 것입니다.

목회자들과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확실히 믿고 행동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수욕을 다 감당하였습니다. 아니 죽으시기까지 하였습니다. 차라리 굶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주님이 채워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다섯째. 심지어 돈 주고 담임목사 자리를 사기까지 하는 경우 그것은 재고해야할 행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늘 돈이 문제입니다. 돈이 좀 있는 목사나 선교사로 돈을 모은 몇몇의 선교사가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곳에 마귀가 끼는 경우입니다. 이미 교회 중직에게 얼마 헌금할 테니 받아달라고 매수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경우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헌금하였다면 그게 헌금이랄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5장에 나온 마음과 양심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헌금의 재현일 뿐일 것입니다. 아직도 그런 그들이 생존하고 있으니 기적같은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 주위를 한번 살펴보면, 이렇게 돈으로 교회를 좌지우지하려는 참으로 더러운 귀신들의 역사가 교회 안에 판을 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것이 있을 것을 아시고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네 안에있는 더러운 귀신아 나오라”고 하신 것은 아닐까요. 일찍이 사도들이 개척의 영성을 소유하여 어디든지 소명을 붙잡고 순교적으로 살았음을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섯째. 요셉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애굽에 머물게 한 것이 애굽의 수치로 불려지는 경우 그것은 재고해야할 행위입니다.

이 경우는 아주 성경을 깊이 들여다 보아야 보이는 것이고 창세기만 보지 말고 구약 전체를 보아야 보이는 경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간 첫 기착지가 길갈입니다. 그 뜻이 애굽의 수치가 굴러가버렸다는 뜻입니다. 이는 요셉의 이스라엘공동체 애굽 유치가 성공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에게 수치를 더하는 것으로 변질되었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애굽은 바벨론과 더불어 세상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빨리 세속적인데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 제단을 쌓고 기도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세속에 물들고 편리주의에 젖어 사는 것을 말합니다. 불신자들은 이런 신자들을 보면서 ‘제단 없이 기도 없이 살아도 되는구나. 저 사람들은 신자가 아닌가! 지금이 금요밤이고 주일인데 교회에 안 나가네’라고 조롱할 정도로 경건생활을 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것을 애굽의 수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의롭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말을 잘한 존경스런 인물이지만 30세가 넘어가면서 창세기 46:32 이하에 보면, 그는 애굽 왕의 눈치를 참으로 많이 보았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애굽에서 자신은 전권을 가졌다고 하였고, 애굽 왕도 전결권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니엘처럼 아니 그 선조들처럼 제단 흔적이 없었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그의 경건의 핵심을 언급함에 그 선조 족장신앙과는 다른 영성을 소유하고 있음을 침묵으로 답변하여 줍니다. 그 결과 창세기 49:8 이하에 보면, 그 아버지 야곱도 사랑한 요셉보다 돌아온 유다에게 더 큰 축복을 하게 됩니다. 요셉은 지병도 없었는데 110세에 단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당시 수명보다 그를 육칠십세 정도 빨리 데려가신 것이었습니다. 그가 더 머물면 이스라엘 공동체는 세속왕국과 같을 뿐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창세기의 절정은 유다의 승리로 끝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 후손들에게 그 선조들의 새로운 전통이 된 제단을 쌓는 영성을 이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그 아들 에브라임에게서 나타났습니다. 그 지파는 나중에 엉뚱한 예배를 드립니다. 맘대로 제단 쌓는 날을 바꿉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대적하여 뛰쳐나가 강국인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우는데 우두머리가 됩니다.

여기서 요셉의 어머니 라헬의 그 세속적 성공의식 영성과 요셉의 부인의 애굽의 세속적 영성이 그 안에 잠재된 경우를 생각하여 볼 수 있습니다. 그 후손들이 이른바 마귀왕국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 내에서 자기 그룹을 끌고 나가 큰 대형교회를 단시일 내에 이뤄낸 성공적인 경우일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를 보면, 꼭 고대의 왕국들의 흥망성쇠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일 것입니다. 이건 세속적인 지상도성의 모습일 뿐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시퍼렇게 살아계십니다. 꾹 참으면서 야곱의 첫 부인 자리를 지킨 그 어머니 레아에게 하나님은 그 좋은 하늘의 것을 다 주었습니다. 그녀가 인내하며 기도한 그 넷째 아들 유다에게 다 내어맡겼습니다. 그것이 20년 이상이 걸리고 50년 이상이 걸릴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씨 뿌린 자의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 가운데 보내시고 그런 지도력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사역자들은 총리되고 성공한 요셉의 지도력이 아닌 어머니 레아의 살아있는 신앙으로 부활의 삶을 산 넷째아들이었던 유다의 지도력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는 생명을 중시하고 다 죽어서라도 이스라엘 공동체로 컴백하여 그 공동체원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종이 되고, 담보가 되고, 첨병이 되어 희생적으로 살아가면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 가운데로 주 예수님은 임하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영성을 예수님의 사도들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신약의 사도들도 한결같이 쓰러졌다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회개하고 소명의 자리로 성령의 능력을 받아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넷째아들인 유다의 부활영성과 맥을 같이 하는 예수님이 심으신 사도영성을 가지고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주님의 뜻을 받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김회창 저-'사도영성' 서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