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은 이름을 세계적인 의미를 지닌 이름으로 개명하였습니다.
본문인 창세기 17:5에서 99세인 자신의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또 15절에 보면, 아내의 이름까지 바꾸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에 이르러 적응 하느라고 자신의 삶을 보듬지 못하였었습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사래에서 ‘사라’로 바꾼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1)그는 자신의 존재 의미로 세계 영혼을 구원하는 의미가 있는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가75세에 가나안을 향하여 떠나서 신앙 중심적으로 산다고 하는 99세인 지금까지 지나다보니 막상 자신의 신앙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결단 없이 살아왔음이 보여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왕에 주님의 인도를 받은 몸인데 하면서 주님의 주시는 영감대로 개명을 하여 부부가 지향하는 목표를 세우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세계의 많은 시온이즘을 부르짓는 사람들은 자기 유대 나라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믿음의 조상, 그 선조인 아브라함은 그 부부가 다 열방을 향하여 그 마음을 열었습니다
.
2)그는 하나님의 사랑이 다르다는 것과 그 사랑의 내용을 알리고 싶어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이 세계적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내면에 ‘너의 후손 만이 아니라 만민을 사랑하노라’는 그 음성을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일반 사람들과 좀 다른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하였었습니다. 그는 시대의 소리가 되어 그 길을 걸어갔었습니다.
그런 그가 주 예수의 복음을 목격하는 순간 그 증인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세상 죄를 지고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에게 주목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띄우기에 전심전력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초점이 맞춰진 설교자로, 예언자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는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알리고 싶었고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내용을 전달하는 소리가 되기로 결단하여 예언자로 살아갔습니다.
3)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복하여 사는 자답게 의미있는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세계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것보다는 수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 경우가 바로 아브라함의 개명사건이었습니다.
“네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라.”
이것은 네 생각의 폭을 넓히고 바꾸라는 것이 었습니다. 사람은 그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10여년만에, 곧 99세에 생긴 신앙 사건이었습니다.
제가 해군 군목으로 입대하여 제일 어려운 것이 해병부대에 배치받아 사역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해병부대에 시무하려면, 명찰부터, 옷부터, 모자부터, 호칭부터, 다 달라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군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꾸고 나면 그렇게 편리하였습니다. 일이 일사천리였습니다. 그 이유는 해병대는 복종 공동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복종이 없이는 적진을 향하여 최일선으로 나갈 수 없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해병대 생활은 그 존재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신앙인과 사명자는 개명한 아브라함처럼 그 존재 의미를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