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론

천국을 침노한 세례 요한

ULI 2009. 1. 5. 22:01

마 11:2-15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도 좀 고난이 길어지면 그렇게 외쳐대고 독백을 하기도 합니다.

“왜 내가 이 고난을 겪어야 하는가?

왜 나만이 이 고통을 당하여야 하는가?“

이와 같이 고난의 유익을 상실한 채 눈을 돌려서 이 상황이 얼마나 갈 지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고 초급해 하면서 이탈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이것입니다.

“오실 그이가 진짜 당신 맞습니까?”

둘째로, 그것은 세례 요한이 주 예수님의 나라의 도리를 전파하다가 긴 감옥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오직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는데, 진정으로 도덕성 영성 회복운동을 하였는데 하나님의 능력 보다는 감옥이라는 수난을 당하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러니 신앙이 좀 흔들릴 수 있었겠지요. 그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 그것은 그가 죄를 지어 감옥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직 그는 이렇게 회개를 외쳐대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였으니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2) 그것은 주 예수님을 높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헤롯 왕은 고함을 쳐대었습니다.

“내가 왕으로, 통치자로 있는데 또 무슨 왕이 오셨다는 것이냐?”

3) 나아가 당대의 실세인 왕에게 도덕적 불감증을 지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찌 한 나라의 왕이 동생의 부인을 취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색욕을 즐기는 부인 헤로디아를?”

이것은 세례 요한을 종교 차원을 넘어서 정치적인 적으로 생각하던 차에 잡아 쳐 넣을 구실의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동생의 아내까지 찬탈하여 색욕적이고 향략적인 삶을 영유하는 것은 진짜 아니다.”

그는 도덕성을 무너지게 하는 자는 지도자의 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잡혀서 감옥에 들어가 죽을 날을 기다려야하는 그에게 메시야의 임재는 간절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뛰어준 나를 향한 그 메시야라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 사용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조금만 있으면 천군천사를 거느리고 이곳에 오셔서 나를 구해주실 것이야.”

그렇게 고통스럽게 감옥에서 기다렸는데 그 메시야되신 예수님께서는 생각이 달랐었습니다.

그분은 시간을 두고서 하여도 될 일들에 전념하시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전해오는 소리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 귀머거리 앉은뱅이 한편 손 마른자 등 이른바 병자들을 치유하고 전도하고 계십니다. 선생님에 대해서는 그 어떤 말도 전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리이까? 내가 다른 자를 기다려야 하오리까?”

여기서 한번 생각해보겠습니까?

이것이 혹 내가 아닙니까?

긴 침체의 길을 걸어온 오늘 우리가 기다림이라는 데에 한계를 지닌 자들은 아닙니까?

“더구나 지난 한 해는 내가 하나님의 일에 그래도 어려웠어도 발버둥 친 한 해였는데....”

우리가 그러하다면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 전파에 전적으로 헌신한 자였었는데 얼마나 그러하였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입니다.

주님은 세례 요한의 한계를 이렇게 극복하게 하시었습니다.

오늘 그가 참기 힘든 그 기다림이라는 시간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하여 주었습니다.

“그 시간이 그 사건이 바로 천국을 침노한 것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침노하는 자’는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사단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 열정을 가지고 그것을 정복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는 천국을 소유하려고 광야의 외치는 자로 살았습니다. 천국복음을 외쳐댔었습니다.

그가 왜 천국을 소유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세상의 위대함보다는 천국이 더 귀중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천국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기에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일어서는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침노한다는 강한 표현을 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만큼 천국을 쟁취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최대의 전투요 가장 절박한 문제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세례요한에게서 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였었기에 감옥에서 지금 갈등이 심하였을 것입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나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여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그것을 해석해 보면,

1) 사역하다가 그것을 고집하여 실패한 것처럼 낙망스러운 마음이 들어도 “천국은 확실한데”라고 고백하는 순간에

“그게 영성적으로 너에게는 천국에 이르게 한 것이었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2) 그 낙망스러운 삶의 형편 속에서 그가 하나님의 영역에 승리자로 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환난을 당하면서

영혼이 가난해지게 되었을 때에 이러한 축복을 받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천국을 볼 것임이요.”

또한 의를 위하여 싸우다가 어려움을 겪을 때에 다음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고통중 기다리는 시간에, 그 시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져서 천국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갈등하는 순간에는

‘알포드’라는 신학자가 비유한대로 “세례 요한은 천국의 문지방에 서 있었을 뿐”이라고 말했던 것을 이해할만한 하게 됩니다..

이 말은 세례 요한이 천국에 못 들어가서 그 문턱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에 관한

말씀을 주의 깊게 더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 예수님은 그에 대하여 확실히 다르게 언급하여주어 전달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11절의 말씀이었습니다.

1)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 같았었고,

2) 또 천국 밖에 있게 하는 것 같았었고,

3) 지금은 마구 흔들어대시는 것 같았는데

이렇게 말씀하여 주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1) 이것은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의 눈물을 주님은 아시고 계심을 확인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2) 또한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의 사역에 대한 보상을 말씀하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장 핵심 도리에 그토록 충성하였던 세례 요한에게 전달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세례 요한이 어떻게 살았기에 그러한 축복을 전달받게 되었습니까?

이른바 ‘천국을 침노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고유 영역이고 이곳을 침입한 자는 살아남지 못하였는데 그 영역을 침노하고도 칭찬을 들은 자가 바로 세례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 천국은 침노를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그 길을 튼 천국 개척자라는 것입니다.